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단 편집) === 서울 함락과 한강선 방어작전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HDYffpe9spU)]}}}|| || {{{#000,#fff {{{1950년 6월 28일 서울 함락 당시 평양방송의 라디오 방송이다.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서울해방전투'라고 부른다.}}}}}} || >6월 28일, 서울은 해방됐습니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의 보도. 서울시를 포위하고 있던 인민군 부대들은 오늘 28일 새벽에 서울 중심 지대에 돌입하여 리승만 괴뢰정부의 소위 중앙청을 비롯하여 서울시청, 검찰청, 방송국, 각 신문사, 교통, 운수, 체신, 은행 등 주요 기관들을 차지하였다. 28일 11시 30분, 영웅적 인민군대는 반공격을 개시한지 단 3일 만에 미제 침략자들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서울을 완전히 해방시켰다. >---- >6.25 전쟁에서 서울을 점령한 날 북한 평양방송 보도 [[이시영(정치인)|이시영]]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은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겠다고 결심했으나 결국 지인의 설득으로 수원으로 뒤늦게 피난가게 되는데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즉각 납북되었을 기세였다. 만약 그가 납북되었으면 당시 부통령도 나름대로의 헌법 기관이었던 만큼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 등에 악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실제 월북하거나 납북당한 제헌의원 등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조소앙]], [[김규식]], [[안재홍]] 등이다. 북한군의 진격이 왜 지체됐는지 추정만 가능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중동부 전선의 지지부진한 전황과 도하장비 및 전술적 역량 부족이 꼽힌다. 우선 북한군이 처음에 계획한, 대한민국 국군을 포위하여 일제 섬멸한다는 전략은 국군 [[제6보병사단]]이 [[춘천-홍천 전투]]에서 북한군의 제2군단의 진격을 3일이나 저지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힘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이는 북한군의 한강 도하가 늦어진 중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이 전투의 패배를 책임지고 북한군 제 2군단장은 해임당했다.[* 6사단은 그 후 동락리 전투에서도 북한군 연대 하나를 전멸시키고 소련제 무기를 대량으로 노획하여 북한의 배후에 소련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2군단이 우회하여 수원을 점령함으로써 한강 이북에 배치된 국군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북한군 작계상 한강 이남에 가장 먼저 도달하는 것은 2군단이 되어야 했는데, 정작 2군단의 공격이 지지부진하니 1군단도 한강 이남으로 본격적인 도하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웠다는 가설이다. 둘째로는 도하장비의 부족을 들 수 있다. 북한군은 서울 함락 하루 뒤인 6월 29일부터 탐색 목적의 소규모 도하공격을 실시하면서 빈틈을 노렸지만 연이어 격퇴당했고, 서울 함락 3일 후 시작된 본격적인 공세도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진 것은 7월 3일 복구된 한강 철교를 건넌 전차가 노량진 땅을 밟으면서였는데, 만약 북한군에 도하장비가 충분하여 전차를 비롯한 주력부대를 보다 신속히 도하시킬 수 있었다면 한강선에서의 지연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게다가 북한군은 도하작전시 침투부대 운용이나 대안상 화력 운용 등에서 여러 전술적 미숙함을 노출했고, 작전적 차원에서는 2군단의 우회공격이 실패한 상황에서 1군단에 의한 정면공격으로의 전환 역시 결심이 늦었다. 이것 역시 북한군의 도하가 지연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소련군의 제파식 전술을 북한군이 제대로 받아들였다면 북한군은 2군단의 공격이 돈좌된 상황에서 1군단의 기세를 몰아 극심한 손실을 각오하고 신속히 도하하여 정면 공격을 하거나[* 독소 전쟁 당시 소련군은 히틀러의 반대로 대충 형성된 독일군의 드네프르강 방어선을 그대로 밀어붙여 돌파한 이후 전차군을 활용한 협격 공세로 독일군 제 8군을 거의 포위 섬멸할 뻔 했다.] 위력 정찰 등으로 국군의 주의를 한강 방어선에 끌어두고 주공을 신속히 동진시켜 상대적으로 약한 방어선의 고리를 공략하거나 국군 6사단의 배후를 쳐서 2군단과 합류해야 했는데 북한군의 전술, 전략적 식견은 그 수준이 되지 않았다. 그밖에 북한군이 지체한 이유에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국회의원들을 잡아들여 임시국회를 개최해서 공식적으로 항복 선언을 하게 하려 했으나 대부분 피난해서 실패했다는 설, [[박헌영]]이 주장한대로 서울만 점령한다면 지하조직 세력 빨치산 주도로 남한 전 지역에서 북한에 동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나서 알아서 무너질 것을 기다렸다는 설[* 그러나 빨치산은 국군과 이승만 정부의 대대적인 소탕작전 덕분에 거진 사멸한 상태였다.] 등이 있다. 그리고 한강대교 폭파로 인해 적의 한강도하를 막은 국군은 28일부터 7월 3일까지 6일 동안 적을 저지했다. [[한강 방어선 전투]] 참조. 그리고 이 전투는 후일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공로가 된다. [[https://youtu.be/HDYffpe9spU|서울 함락]] 직후의 상황은 그야말로 절망적이어서 서울 점령 전투에서 국군 1, 2, 5, 7, 수도사단이 와해되었다. 제대로 편제와 장비를 유지한 것은 춘천의 6사단과 강릉의 8사단 뿐이었고, 대전으로 후퇴한 독립17연대와 영등포로 후퇴한 독립기갑연대, 독립23연대는 편제는 유지했지만 퇴각과정에서 상당수의 화기를 잃어버렸다. 그렇게 모두들 비관하고 있는 순간 [[김홍일(군인)|김홍일]] 소장이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취임했다. 김홍일 소장은 남북한 통틀어 유일하게 사단급 제대를 운용한 실전경험이 있는 지휘관으로, 중일전쟁 당시 국민혁명군 사단장을 맡아 일본군과 전투하여 승전하기도 했다. 공식 전사에는 채병덕이 임명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모 회고록에서는 권한도 없이 김홍일 장군이 마음대로 병력을 수습했고, 후일에 소급명령으로 지휘관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실제로 임명과 활동까지는 약 2일의 차이가 보이는데,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당시 국군에서 명망이 높던 김홍일과 이응준이 채병덕을 설득해서 한강선 일대는 김홍일 장군이, 수원방면은 이응준 장군이 병력을 수습하고 방어작전을 진행한 것으로 보고있다. [[김홍일(군인)|김홍일]] 장군은 먼저 병력을 수습했는데, 한강교 폭파로 인해 한강이북에 잔존한 사단은 중화기는 물론 소화기까지 모두 버리고 몸만 넘어온 상황이었다. 1사단은 건제를 유지했지만 지휘관을 찾지 못했고, 2, 5, 7, 수도사단(구 수경사)은 지휘체계자체가 와해되어버렸다. 김홍일 장군은 완전히 무너지고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고 재편하여 한강선에 응집성 있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괜히 백선엽 장군이 "이분(김홍일)이 없었으면 조국은 적화통일되었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 아니다. 이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1군단으로 재편되어 국군 지연작전의 중추로 활동하였다. 거기에 지연작전의 개념을 구축하고 이에 기반으로 부대를 운용하였다. 사실 국군에서 지연작전 경험이 있는 사람은 김홍일 장군이 유일했는데, 중화민국의 국민혁명군에서 중장으로 근무하면서 '''실제로 군단급 부대를 운영하면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지연작전을 수행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흔한 인식과는 달리 당시 대부분의 서울 시민들은 피난을 갈 이유가 많지 않았다. [[남한군]]이 이미 [[서울]]을 버리다시피 패주하고 있었고,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한 [[조선인민군]]이 '서울해방전투'의 승리로 전쟁의 승기를 잡아서 [[한반도]]를 단시간 안에 통일할 기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회의원]]들과 [[조선일보]] 사장 같은 고위층 인사들 중에서도 피난을 가지 않고 공산주의로의 통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국군 가족과 경찰 가족, 기타 생계와 관련된 이유로 반드시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을 가야할 이유가 있었던 시민들과, 시가전을 우려한 일부 시민들은 피난을 가려 했는데, 다음날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A, B선이 폭파되어 한강을 건너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비난과 원성이 높아지자 무책임한 군 당국은 거부할 수 없는 상관의 명령을 받아 폭파를 시행한 공병감 [[최창식(군인)|최창식]] [[대령]]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를 적전비행죄로 몰아 [[총살형|총살]]했다. 후일 명령을 집행했을 뿐 책임이 없는 것이 인정되어 1964년 무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긴 했으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현재 기준으로 보자면 비난받아 마땅한 재판이다. 자세한 것은 [[한강 인도교 폭파]] 항목 참조. 지상전의 중요성과 급박한 전개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떨어지는 편이지만, 이 당시 [[남한]]의 해군, 공군의 전황 역시 좋지 않았다. 전쟁 직전 대한민국 공군의 작전기는 제대로 된 전술기가 전혀 없었고 연락 및 정찰 임무에 사용하는 L-4/5 연락기 12기, 훈련기인 [[노스 아메리칸 T-6 텍산|T-6]] 텍산 10기 뿐이었다. 그 중 L-4/5는 육군 항공대 소속이어서 공군이 직접 운용하지 못했기에 결국 공군이 운용 가능한건 텍산이 전부였다. 또한 비행기 성능도 열악하여 T-6는 정비병들이 급조한 폭탄가에 소량의 폭탄을 장착해 지상 공격을 해야 했고, L-4/5는 이마저도 불가능해서 후방석의 관측사가 1차대전 방식으로 직접 수류탄이나 박격포탄 등을 손으로 던져 투하해야 했다. 그나마도 수량이 부족해서 시제품으로 만든 소형 항공폭탄은 개전초에 모조리 사용해버린 후였다. 게다가 북한 공군은 당시 한국 공군에 전투기가 사실상 한 기도 없다는 점을 파악하고 개전 초기 김포비행장과 수원비행장에 공습을 가했다. 이 공습은 규모가 크진 않았으나, 엄연히 공습이었던 만큼 김포공항에 주기된 미군 소속 [[C-54]] 수송기가 북한 공군의 [[Yak-9]] 전투기에게 파괴되는 일이 벌어졌고, 이에 북한 공군을 얕잡아봤다가 충격을 받은 미 공군은 급히 C-54등 수송기들을 후방으로 철수시키는 동시에 [[주일미군]] 소속 [[F-82]] 트윈 머스탱들을 투입시켜 호위를 맡겼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국 전쟁 최초의 공중전도 벌어졌다. 당시 호위 임무를 맡고 있던 미 공군 소속 트윈머스탱 5기를 Yak-9 5기가 공격하여 공중전이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Yak-9 3기가 격추당하고 남은 2기는 후퇴했다고 한다. 미 공군측의 손실은 전무했다. 공교롭게도 한국 전쟁 최초로 제트기가 동원된 공중전도 위 전투 당일에 일어났는데, 김포비행장 인근에서 비행중인 [[IL-10]] 공격기 4기를 [[F-80]] 슈팅스타 4기가 공격, 손실없이 전부 격추하였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미군 등 UN 공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제공권은 UN군 측이 장악하게 되었다. 해군의 경우 남북한 해군 모두 질·양적 수준이 빈약해서 함대간의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북한의 경우 전투 전력으로 [[G-5급 어뢰정]] 몇 정이 있었고 한국 해군은 백두산함 1척과 충무공정이 있었지만 양측 모두 본격적인 교전을 치를 수준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에야 전사 연구를 진행한 결과 해군도 활약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대한해협 해전]]에서 PC-701 [[백두산함]]이 북한군의 후방침투를 막은게 바로 그것이다.[* 단 이에 대해서는 당시 백두산함이 교전한 선박이 정말 북한군 소속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자세한 건 [[대한해협 해전]] 문서 참조.] 그리고 이것이 육해공 통틀어서 국군 최초의 승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